금강경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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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상식 타파하는 부정에서 출발
주관배제‘있는 그대로의 진여’가르쳐
“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이 아니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이라 불린다.”금강경은 비교적 짧은 경전이면서도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기는 그리 용이하지 않다. 우리가 금강경을 읽으면서 어려움을 느끼는 점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어법이 종종 등장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금강경에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이 아니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이라고 한다”는 말이 등장한다. 이러한 어법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금강경에서 사용되는 대부분의 불교용어들이 대개 이러한 문장의 틀 속에서 언급되고 있다.
금강경 사상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이러한 문장 형식에 담겨 있는 의미를 파악할 때 비로소 금강경의 메시지가 근본적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 상식 또는 합리적 이성에 배치된다는 점에 이해의 어려움이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위에서 인용된 문장을 기호화하여 분석해 보면 다음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①A는 A라고 하지만, ②A는 A가 아니다, ③그러므로 A는 A이다 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①에 대해서는 이견을 갖지 않는다. 우리의 합리적 이성에 합치될 뿐만 아니라 상식에도 일치하는 것으로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우리는 ②에 대해 의아하게 여긴다. 논리학의 기본원칙인 모순율 즉 ‘A는 비(非)A가 아니다’는 원칙에 어긋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A는 비A가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어떻게 ‘A가 곧 A가 아니다’ 라고 하는가.
그러나 반야사상은 ②에서와 같이 우리의 지성과 상식의 울타리를 돌파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①은 우리에게 상식을 가르쳐주지만, ②는 우리에게 상식에 안주하지 않고 이를 근본적으로 반성해 볼 수 있는 부정의 정신을 심어준다. 여기에서 우리는 딜렘마, 진퇴양난의 처지에 빠지게 된다. 하나의 주장에 대한 긍정과 부정이 동시에 성립하기 때문이다. 상식에 따르자니 엄연히 반성이 존재하고, 반성을 따르자니 상식이 저항하는 꼴이다.
선종에서의 화두·공안은 바로 이와 같은 기능을 갖는다. 화두는 우리를 상식에 어긋나는 상황으로 인도한다. 심지어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부처님의 말씀에 대립되는 것을 제시하기도 한다. 유명한 조주(趙州, 778-897)스님의 무자(無字) 화두가 그것이다. ‘모든 중생에 불성이 있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익히 알고 있던 조주 문하의 한 스님이 비루먹은 개를 보고 저렇게 천한 것에도 과연 불성이 있는 것일까 하는 의심을 갖게 되었다. 그가 조주스님께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제기했을 때 스님의 답변은 의외로 ‘없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 의문이 더욱 증폭되고 있다. 부처님은 있다고 하시는데, 우리 큰스님은 없다고 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관념에서 벗어나 삶의 세계, 사실의 세계로 돌아옴으로써만 해결된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하는 바와 같이 세계는 끊임없이 변한다. 변화라는 것은 차이성과 동일성이 공존함을 전제로 한다. 우리의 삶도 생과 사가 겹쳐 있다. 살아가는 과정이 곧 죽어 가는 과정인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삶도 세계도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적극적으로 말하여 모순이야말로 세계의 실상이다. 관념에서의 모순은 배제되어야 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세계를 대립과 갈등의 구조로 파악한다. 그러나 삶의 세계에서는 모순이 공존하며 나아가 서로서로 스며들어 하나를 이룬다. A는 A이면서 동시에 비A인 것이다. ③에서 A가 다시 긍정되고 있는 것은 이와 같은 반성을 경유하여 확인되고 있는 새로운 차원의 세계인식이다. 이것은 주관의 왜곡됨이 없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것으로서 깨달음의 세계, 진여(眞如, tathat )의 세계에 다름 아니다.
금강경의 이러한 사상은 즉비(卽非)의 논리로 불리기도 한다. 즉비의 논리는 금강경의 핵심사상이면서 반야사상의 근간을 이룬다. 나아가 선사상에도 깊이 침투하여 화두의 형식으로 귀결되고 있다. 우리는 송나라 청원유신(靑原惟信) 스님의 말씀 속에서도 이러한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스님의 말씀은 ‘30년전 참선 공부를 하기 전에는 산은 산, 물은 물이더니 여러 선지식을 참견하고 조금 깨친 바로는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게 온전히 깨치고 보니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우리는 금강경의 가르침을 이해함으로써 이 유신스님의 수행과정, 깨달음의 세계를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정호영<충북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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