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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무착’과 ‘무주’
-월호스님-
“바로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충실해야”
상대를 부처님 대하듯 하면
허물도 눈에 들어오지 않아
한 불자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몇 일전 지극히 가까운 지인 하나를
잃고 비탄에 잠겨있었는데,
불교TV의 영화 속 불교여행’프로그램을
보고 커다란 위안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 내용 가운데
‘사랑하되, 애착하지 말라’는
말이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금강경〉의
‘응당 머무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는
말을 현대식으로 풀어서 표현한 것이다.
그 마음을 내라는 것은 중생제도의 발원을 말한다.
중생제도는 중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제도는 어불성설이다.
머무는 바 없다는 것은
애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강력접착제가 발라져있는 곳을 지나게
되면 꽉 달라붙어 머무르게 되는 것과 같다.
애착은 머뭄을 낳고,
머물다보면 애착이 생겨나게 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심지어
제자들에게 같은 나무 밑에서 3일
이상 정진을 하지 못하도록 하셨다.
‘내 자리’라고
하는 애착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결국 애착하지 않는 무착(無着)과
머무르지 않는 무주(無住)야말로
불교의 핵심 행동강령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불교에서는
찰나생멸을 설하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는 변화한다,
그리고 그 존재를 이루는 요소
가운데 고정불변의 실체인 ‘나’는 없다.
모든 존재는 찰나생멸하고 있는 것이다.
고정된 ‘나’가 없는데 어디에 머무를 것인가?
무엇에 애착할 것인가?
그 찰나 찰나를 열심히 살아가면 될 뿐.
찰나를 열심히 산다는 것은
찰나 찰나에 완전 연소하는 것이다.
완전 연소는 그 순간을 불태우는데 열중하는
것이며, 당연히 찌꺼기가 남지 않는다.
더 이상 후회나 미련이 남지 않는 것이다.
그 순간에 철저하지 못했을 때,
후회나 미련이 남는다.
‘좀 더 잘해줄걸…’,
‘좀 더 열심히 할걸…’
‘사랑한다고 말 할걸…’
하는 식으로 찌꺼기가 남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무착과 무주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대면하고 있는 이에게 충실할 필요가 있다.
가정에서는 남편과 아내,
혹은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정말 고마워,
당신 덕분에 이렇게 잘 살고 있는 거야.
당신이 최고야’ 하는 식으로 대하는 것이다.
간혹 남편보다 부처님이
더 좋다고 하는 불자님이 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절에서 부처님 공경하는 마음을
가정에 가져가 남편에게 실행해야 한다.
부모님이 부처님이고, 아이들이 부처님이다.
부모님이 안계시면 내가 어찌 있을 것이며,
가장이 없으면 누가 나를 먹여 살리나.
아울러 직장에 가면,
동료나 선후배에게 최선을 다한다.
‘당신들 덕분에 열심히 일할 수 있는 거야’
하는 식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몫을 충실히 이행해나가는 것이다.
이처럼 바로 지금 여기에서
대면하고 있는 상황에 충실히 살아갈 때,
지나간 과거에 대한 후회나 미련이 남지 않는다.
앞으로 닥쳐올 미래를 걱정할 필요도 없다.
상대를 부처님 대하듯 하면
허물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사고뭉치 아들을 둔 한 어머니가 있었다.
타일러도 보고 나무라기도 하였지만 도저히
말을 듣지 않아, 한 스님에게 상담을 하였다.
스님은 아들의 칭찬꺼리를
찾아내 일기를 써보라고 하였다.
하지만 칭찬꺼리가 도통 없었다.
술이 흠씬 취해 외박하기가 일쑤인
아들에게 칭찬할 만한 구석이라곤 없었던 것이다.
어느 날,
아들이 자정이 되기 이전에 귀가했다.
그래서 일기를 썼다.
‘오늘은 자정이 되기 전에 귀가했다.’
어느 날은 술이 덜 취해 들어온 것을,
어느 날은 남과 싸우지 않은 것을 썼다.
이런 식으로 써나가다 보니 그런대로 칭찬꺼리가 있었다.
아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고,
이를 느낀 아들은 어느 날부터인가
사람이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다고 한다.
허물과 칭찬꺼리는 마음먹는 대로 눈에 띄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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